최불암 김민자 러브스토리와 인생이야기
최불암은 좀 묘한 배우입니다. 이십대부터 자신의 나이보다 1~20년 연상의 배역을 주로 맡았기에, 항상 노인 이미지였죠.
그래서 항상 근엄한 할아버지 같은데,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은 좀 달랐습니다. 여느 이십대와 마찬가지로 장난기가 많았고, 또 예쁜 여자에게는 서슴없이 대시하던 저돌적인 면도 가졌죠.
최불암 김민자 부부 사진
최불암 임예진 사진
탤런트 겸 영화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은 1940년 6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최불암 고향). (원래 고향은 서울인데, 어릴 적부터 인천에서 자랐기에, 인천이라고 오해를 많이 하죠.)
올해 75살이죠(최불암 나이).
(최불암 학력 학벌) 신흥국민학교, 중앙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중퇴 후 명예졸업장)
(최불암 프로필 및 경력) 원래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65년 국립극단 단원이 되었고, 1967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합니다.
대표작으로 수사반장과 전원일기가 있으며, 한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의 아버지'상을 가장 잘 연기한 국민배우라는 칭호를 받고 있지만, 어렸을 때에는 불우한 환경속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은성이라는 주점을 해서 외아들인 최불암을 키웁니다. 서울예대에서 최불암은 연극의 매력에 빠지지만, 자신의 외모가 평범한 것을 알고는 연출자나 감독의 꿈을 꿉니다.
최불암: "나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연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우선은 외모가 너무 평범했다. 당시는 게리 쿠퍼, 그레고리 펙같은 미남들만 배우가 될 수 있었고, 요즘처럼 개성파 배우들이 활개치던 시대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최불암이 연극에서 나이 많은 배역을 그럴 듯하게 소화하는 것을 본 연출자가 최불암에게 노역(나이 많은 배역)을 맡깁니다.
최불암: "당시 충무로에서는 최무룡선배나 신성일씨 등 청춘배우들이 여성팬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고 그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타고난 외모는 어쩔 수 없었다. 내게 돌아오는 배역은 늘 노역뿐이었다."
최불암: "노역은 고역이었다. 언제나 지우기 힘들 정도의 짙은 분장을 해야했고, 진한 분장탓에 연극 한편이 끝나면 얼굴이 푸석푸석해지곤 했다. 무대 의상도 낡고 허름한 것들뿐이었다. 그시절 인기배우들이 스크린 속에서 즐겨 입었던 '골덴' 양복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서라벌예대 동창이자 평생 친구인 김순철과 나는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평범한 생김새를 탓하곤 했다."
이렇게 외모는 최불암에게 컴플렉스가 되었죠.
그리고 서울예대를 졸업한 최불암은 연극 무대에 뛰어듭니다.
자신이 연극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에는 할게 없었기 때문이죠.
최불암 젊은 시절 과거 사진
최불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연극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명동서 운영하던 '은성'도 썩 잘되지 않던 터라 집안 살림이 무척 쪼드릴 때였다. 부정기적으로 서는 연극무대 수입으로는 생활비는 커녕 대포 한두잔 값을 치르기에도 부족했다."
최불암: "용돈이라도 벌 요량으로 시작한 게 국립극장 엑스트라였다.
엑스트라에게 돌아오는 배역이란 건 뻔했다. 행인, 군중 등 눈에 띄지않는 사소한 배역이 대부분. 당시 나는 엑스트라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포졸'이나 '병사'역을 주로 맡았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하다 적의 칼에 맞아 쓰러지는 역은 '엑스트라 최불암'과 친구 김순철의 단골배역이었다."
최불암: "엑스트라 생활은 단순노동과 다를게 없었다. 대사도, 표정연기도 필요없었다. 그저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그저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그 일이 싫증이 나면 때때로 공연중에 장난도 쳤다. 한번은 김순철이 '숨진' 포절 역을 맡은 적이 있었다. 역시 포졸로 출연했던 나는 그를 골려줄 생각으로 배를 힘껏 밟고 달린 적이 있었다. 아픔을 참지 못한 '숨진' 포졸 김순철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고, 객석은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
최불암: "일주일동안 음식만 나르는 포절 역을 맡은 적도 있었다. 먹을 게 변변치 않았고 늘 공복감에 시달리던 젊은 시절이라 내가 날라주는 술과 오징어 안주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상대역 엑스트라가 그렇게 얇미울 수가 없었다. 한번은 오징어에 오줌을 적셔 건네준 적이 있었는데, 사실을 모르는 상대방이 오징어를 열심히 먹어대는 바람에 웃음을 참지못해 내가 도리어 혼쭐이 난 적도 있다."
최불암: "일주일 가량 계속되던 공연이 끝나면 하룻밤 술값만큼의 출연료가 지급됐다. 그 돈으로 김순철과 나는 종로로 나가 밤새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무명배우의 설움을 달래곤 했다."
최불암 리즈시절 사진
청년 최불암이 장난기가 많았네요. 지금이야 할아버지이고, 또 사십대부터 할아버지 역할을 주로 맡아서 그런 이미지가 굳어있지만, 최불암에게도 혈기방장한 이십대의 청년 시절이 있었죠.
그리고 최불암은 이런 장난을 치면서도,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최불암: "고생은 했지만 엑스트라를 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당시는 연극계 대선배인 이향, 백성희 선생이 국립극장 주연배우를 맡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향선생의 대사를 모조리 외웠다. 그 분이 무대에 올라가 연기를 하면 나는 무대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이향선생의 대사를 읊조리며 그의 몸짓을 흉내내면서 독학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당장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최불암은 단역과 엑스트라만 전전했고, 그러다가 한양대에서 영화과 1회 입학생을 뽑는데, 기성 연극인을 특차로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혹시 여기를 나오면 좀 더 잘될까 하는 생각에 최불암은 친구인 이철향, 허둥웅 등과 나란히 입학하게 되죠.
하지만 영화과라는 것이 연극과와 별로 다를 것이 없고, 그냥 16mm 카메라와 영사기가 더 있을 뿐이었죠(후에 연극영화과로 통합됨). 그런 상황에서 최불암은 친구들과 함께 '대학교농촌순례위문단'을 조직해서 전국의 농촌을 돌면서 영화상영과 연극공연을 펼칩니다.
그러다가 3학년때 군에 입대했고(당시 최불암은 부 사망 독자였기에 굳이 군대를 갈 필요는 없었음), 제대 후에는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복학을 하지 못합니다.
부산에 있는 작은 아버지의 염색 공장에도 잠깐 다녀보았지만, 최불암은 적성이 맞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서울로 올라옵니다.
젊은 최불암이 방황을 하던 때였죠.
최불암: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오니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복학을 포기했으니 돈이라도 벌어야했지만 마땅한 취직자리가 없었다. 함께 연극을 하던 친구들은 TBC 등 방송국에 입사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자존심때문에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지도 못했다."
최불암: "그때는 능력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미웠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살 가치도 없는 인간처럼 여겨졌고, 그게 참을 수가 없었다.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으로 갔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강가에만 가면 나 하나만 믿고 사는 어머니가 생각나 되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최불암은 갑자기 집근처에 있는 교회를 떠올리고는 거기를 찾아갑니다. 그 교회 목사는 최불암을 생전 처음봤지만, 그래도 의미있는 설교를 합니다.
목사: "이 세상의 모든 떡을 다 먹으려 하지 말게. 자네 몫은 오직 한 덩이 밖에 없네."
(최불암에게 종교는 없음. 특별히 신은 믿지 않지만,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 불교 모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음)
최불암: "목사님의 설교는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내가 할일은 연극밖에 없다는 것. 그는 짧은 몇마디로 방황하던 내게 새길을 인도했던 것이다."
최불암: "나는 자존심때문에 만나지 않았던 친구들을 스스로 찾아가 만났고, 연극무대에도 다시 섰다. 그 얼마후 출연한 연극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는 목에서 피가 터질 정도로 열심히 연습을 했다. 이어서 출연한 작품이 연극 '순교자'다. 작고한 친구 김기팔이 각색하고 허규씨가 연출한 이 작품으로 나는 비로소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원하던 '국립극단' 단원이 될 수 있었다."
최불암 역시 젊었을 때는 이렇게 방황도 많이 했습니다. 그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을 괴로워하다가 의미없는 삶을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방황하는 사람들 역시 용기를 잃지 말고 내일을 향해 도전을 했으면 하네요.
이렇게 최불암은 연극계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는 이십대의 수많은 배우중의 한명이었을 뿐입니다.
이름없는 조연이었던 최불암은 최대한 '튀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최불암: "연극 '이순신'에서 단역 '율포만호'를 맡게 되었다. 내심 섭섭했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에도 무대청소와 소품정리는 막내단원들의 몫이었다. 연습이 끝나면 청소와 뒷정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연극 이순신은 출연자들이 모두 갑옷을 입고 출연한 탓에 연습이 끝나면 무대엔 언제나 갑옷장식이 수북이 쌓였다."
최불암: "그때만 해도 의상과 소품이 정교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갑옷이나 모자에 달린 양철조각, 수술이 곧잘 떨어지곤 했다. 나는 빗자루질을 할 때마다 이것들을 모아 내 갑옷과 투구에 정성스레 꿰맸다. 이런 노력으로 내 갑옷은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고 윤기가 흘러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중에 비밀을 알라챈 동료들이 내 갑옷에서 양철조각과 수술을 떼내 가겠다고 우기는 통에 그것을 막느라 술값이 적잖이 들었다."
최불암: "남들보다 돋보이려는 노력이 도를 지나쳐 연출자의 '애정어린' 노여움을 산 적도 있다. 역시 '이순신'에 출연할 때였다. 함께 출연하던 후배가 연습때 대사가 되지 않는다고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대사는 '승전보고'였는데, 무척 극적이어서 잘만 소화하면 조연중에서 가장 튈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대사를 꼭 하고 싶어 안달하다 후배를 '회유'하기로 결심했다."
최불암: "공연을 마치고 대포집으로 후배를 데리간 나는 그에게 술을 실컷 먹인 후 승전보고를 둘이 동시에 하자는 얘기를 꺼냈다. 잠시 당황하던 후배는 술을 얻어먹은 죄로 마지못해 승낙을 했고 다음날 공연에서 나는 후배와 함께 승전보고를 했다. 그러나 연극이 끝난 후 나는 연출을 맡았던 이진순 선생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다. 허락도 없이 함부로 배역을 바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선생은 한참 야단을 치신 후에 "그래도 너 연기는 참 잘하더라"며 칭찬을 해주셨다."
이십대의 최불암은 이런 노력도 했군요.
약간 잔머리를 굴리기도 했지만, 이런 것이 이십대의 특권이 아닐까 합니다.
차츰 연극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최불암은 평소에 늘 친구들에게 하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미래 부인상이었죠.
최불암: "친구들에게 이상적인 배우자상을 들려주곤 했다. 당시 내가 찾던 배우자감은 이지적인 분위기에 눈이 크고 오똑한 콧날에 도톰한 입술을 가진 전형적인 미인형의 여자였다. 젊은 시절, 배우가 되기에는 얼굴이 너무 평범해 고민하던 나는 2세만은 그 문제로 갈등하지 않도록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다."
여전히 그에게 외모 컴플렉스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불암: "66년 여름쯤으로 기억된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연극인 권명오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KBS 드라마 '정명아씨'에 출연하는 탤런트 김민자가 내가 찾던 이상적인 배우자감과 꼭 닮았다는 얘기를 전했다. 스물일곱의 결혼 적령기, 아내감을 고르던 나는 귀가 솔깃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때라 방송 시간에 맞춰 TV가 있는 제과점으로 달려갔다. 친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원하던 이상적인 외모와 분위기를 모두 갖춘 여자였다."
최불암 김민자 사진(김민자는 당대 최고의 미인 중의 한명이었음)
결국 최불암은 직접 방송국으로 찾아갑니다. 마침 김민자가 매점으로 커피를 마시러 내려왔고, 최불암은 다짜고짜 매점 주인에게 김민자를 대신해서 커피값을 계산합니다.
사실 김민자 역시 최불암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전에 친구들과 함께 최불암이 나오는 연극을 관람했고, 최불암의 이름이 워낙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김민자와 첫만남을 가진 최불암은 '사랑'을 위해서 정들었던 연극무대를 떠나서 KBS로 들어갑니다.
김민자는 1942년생으로 최불암보다 2살 어리지만, 1963년 KBS 3기 공채로 데뷔했기에, 최불암보다는 약 3년 정도 선배였습니다. 또한 당시에 이름없던 최불암에 비해서, 여주인공으로 인기도 높았죠(김민자 종교는 천주교, 김민자 나이, 김민자 직업).
(흔히 전원일기 때문에 김혜자가 최불암의 아내라고 아는 사람이 많죠. 후에 최불암은 MBC로 이적해서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등에 출연함)
KBS로 들어간 최불암이지만, 김민자와는 가까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꾀를 내게 되죠.
최불암: "당시 아내는 새 드라마 '흙'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돼 있었다. 나는 담당 연출자인 박재민 PD를 만나 그녀와 함께 출연시켜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내 뜻은 받아들여졌고, 나는 상대역을 맡아 아내와 좀 더 가까워지는 기회를 얻었다."
둘은 같은 드라마에서 상대역이 되면서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김민자 역시 최불암이 마음에 들어서 연애를 시작하지만, 주위에서는 둘의 연애에 대한 반대가 컸습니다.
당시 최불암은 그냥 성격파 무명 배우였고, 김민자는 여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죠.
게다가 최불암은 하루빨리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김민자는 확답을 하지 않습니다.
최불암: "KBS 드라마 '흙'에 출연하면서 아내와 나는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데이트는 퇴계로에 있는 프랑스풍의 카페에서 주로 했다. 우리는 없는 돈을 털어 와인을 마시고 에디트 피아프의 감미로운 샹송을 들으며 사랑을 쌓아갔다. 그러나 아내는 결혼얘기만 꺼내면 언제나 딴청을 피우거나 어두운 얼굴이 되곤 했다.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내의 집안에서 나를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불암: "당시는 탤런트들의 출연료가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KBS 사극 '수양대군'에 출연했을 때 나는 당시 쌀 두가마니 값에 해당하는 출연료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돈으로 두 사람이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아는 터였다. 하지만 돈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 사이가 평행선을 그으며 별 진전이 없이 계속되던 어느날 방송국으로 기자들이 찾아왔고 나는 첫만남(매점에서 커피값 내주기)처럼 또한번의 '깜짝쇼'를 연출했다."
그리고 최불암은 고의적인 스캔들을 일으킵니다.
사진 기자들이 방문하자, 최불암과 김민자는 같이 사진을 찍었고, 다음날 '둘의 관계가 묘하다'는 루머성 기사가 나간 것이죠.
결국 완강하게 반대하던 김민자 집안에서도 허락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김민자: "둘이 교제할 당시에 남편이 젊었을 때고 또 나와 사귀는 것이 부담을 주었기 때문인지 술을 좀 많이 마시곤 했는데, ‘내가 이 사람을 버리면 타락을 할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됐다. 모성 본능 같은 것이 작용한 것 같다."
둘은 1969년 약혼을 하고, 1970년 6월 27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아들(이름 최동녁)과 딸(최동비)를 낳게 되죠(최불암 자녀 자식).
후에 최불암 아들과 탤런트 서승현의 딸이 서로 결혼을 하면서 사돈지간이 됩니다.
최불암 김민자 결혼 사진
아무튼 이렇게 결혼을 한 최불암과 김민자는 신혼 초부터 많이 싸웁니다.
최불암: "여의도에 신접살림을 차린 우리는 여느 부부들처럼 '티격태격'하며 신혼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결혼생활은 연애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아내는 술과 친구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술에 만취해 귀가하기 일쑤였고, 툭하면 친구들을 집에 불러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내가 술에 취해 쓰러지면 아내는 술상앞에서 밤새 울곤 했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했던 최불암이었기에, 그것이 불화의 근원이 된 것이죠.
김민지: "신혼 3년간은 뭔가 맞지 않는 것같아 의견 다툼이 많았다. 결혼생활은 자연스레 '맞는 것'보다 부부가 서로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십년 이상을 따로 떨어져 살았던 두 사람이기에, 대번에 서로 맞출 수는 없죠. 게다가 술을 좋아하는 최불암이었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더 나빠졌고, 이혼까지도 목전에 두게 됩니다.
그러다가 최불암은 예전처럼 다시 한번 자신을 뉘우치게 됩니다.
최불암: "나의 술습관은 71년 MBC 드라마 '수사반장'에 출연하면서 사라졌다. 나는 인생을 다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드라마에서 배운게 많다. '수사반장'은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사회고발 드라마였다. 내가 맡은 박반장 역은 치안을 책임지는 '안방의 보안관'이자 사회를 계도하는 '큰어른'이었다. 이런 역할을 맡은 연기자가 매번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이후 최불암은 술을 줄이고 가정에 충실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이때부터가 우리가 잘 아는 '국민 아버지'의 모습이 된 것이죠.
결혼후 김민자는 차츰 연기 활동을 줄여나가면서 거의 은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최불암: "아내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요. 가정을 지키겠다고 연기활동을 중단했거든요. 요즘도 좋은 작품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데 그 사람은 안 하겠다고 해요. 자신까지 나오면 집은 누가 지키냐고 하면서 말이죠. 항상 가족을 위해 살아온 아내가 만드는 음식은 어떤 것이든 다 맛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최불암이 아내를 위해서 해준 '좋은 말'입니다.
사실 김민자는 드라마계에 대한 불만과 연기에 대한 부담감때문에 드라마 출연을 고사하게 되었죠.
김민자: "‘이제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꽤 오래됐어요. MBC 드라마 ‘보고 또 보고’에서 못된 시어머니 역을 맡았을 때 특히 힘들었죠. 극중 며느리로 나왔던 김지수씨가 고생했던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대문을 안 열어주는 장면이었거든요. 연기지만 제 모습이 정말 싫고 속상하더라고요. 촬영장 분위기와 시스템이 바뀌면서 낯설게 느껴진 것도 브라운관을 떠난 이유고요."
김민자: "80년대 초에 일일드라마 ‘보통사람들’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3대가 함께 사는 집의 맏며느리 역할이었는데, 가족간 훈훈한 사랑을 그리는 게 좋았어요. 요샌 그런 게 드물어요. 젊은이들의 사랑과 이별 얘기가 대부분이야. 물론 배우에게 은퇴란 없습니다. 지금도 섭외는 꾸준히 들어와요. 수락하지 않는 건, 당장이라도 출연하면 용돈을 벌 순 있겠지만, 재미나 보람이 아닌 일로만 여겨질 것 같아서예요."
부부가 함께 봉사하는 모습
김민자는 드라마는 사회에 어떤 메세지를 던져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들은 너무 막장에다가 흥미 위주의 소재이기 때문에, 출연을 거부하는 것이죠.
아마 훈훈하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메세지를 던지는 드라마라면, 언제든지 다시 복귀할 것 같습니다.
(최불암 역시 최근에는 황혼 재혼같은 따뜻한 드라마 위주로 출연하고 있죠.)
지금이야 최불암이 성공한 국민배우이지만, 그 역시 젊었을 때는 방황하고 괴로워했으며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합니다. 그가 절망했던 것은 외모가 평범했기에 당시의 연극무대나 드라마에 맞지 않았고, 본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방황끝에 최불암은 노력을 했고(물론 중간에 오줌 장난같은 것도 쳤지만...), 마침내는 성공을 하게 됩니다.
지금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도 절망으로 스스로를 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최불암 김민자 부부가 사십년 이상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해왔는데, 그 비결은 김민자의 말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민자: "결혼생활은 자연스레 '맞는 것'보다 부부가 서로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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