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 김수륜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재혼 스토리)
사람은 살면서 기쁜 일도 겪지만, 이런 일보다는 슬픈 일이나 어려운 일을 더 많이 겪습니다. 기쁨이라는 감정은 한순간에 지나가지만, 슬픔과 어려움은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이죠.
탤런트 박영규 역시 기쁜 일이 조금 있었다면, 슬픈 일이나 어려운 일을 훨씬 더 많이 겪습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자신을 추스렸을까요?
탤런트 겸 영화배우 박영규는 1953년 대전에서 태어납니다(박영규 고향). 올해 나이가 61살이죠(박영규 나이).
(박영규 학력 학벌) 대전중앙중학교,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박영규 프로필 및 경력) 1986년 MBC 특채 탤런트로 데뷔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연극 배우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 영화 '별리'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서울 무지개, 주유소 습격사건, 라이터를 켜라,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의 영화와 초록빛 모자, 내일 잊으리, 폭풍의 계절, 순풍 산부인과, 다모, 해신, 백년의 유산, 오로라 공주, 정도전 등의 드라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초반에는 다소 무거운 역을 맡았다가 순풍 산부인과, 주유소 습격 사건에서 연기 변신에 성공해서 코믹하면서도 애절한 캐릭터를 잘 표현합니다. 그리고 정도전에서 이인임을 설득력있게 표현하면서, 조재현, 유동근, 서인석, 안재모 등과 명품 드라마를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서울예대 시절 연극을 본격적으로 접하다가 1976년 군대에 입대합니다(강원도 인제군 포병 333관측대에서 작전병으로 3년 복무).
그리고 1978년 제대 후에 본격적인 연기 인생을 시작했죠.
현재는 연기력에 있어서 손꼽히는 박영규이지만, 출발은 초라했습니다.
박영규: "오태석 선생님이 제 은인이에요. 단언컨대, 오태석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박영규는 없었을 겁니다. 처음 작품에서 소품 담당 심부름을 하고, 6월 드라마센터에서 '태'를 공연할 때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출연했습니다."
오태석은 1940년에 태어난, 한국의 뛰어난 연극 연출가중의 한명입니다.
박영규: "전 오 선생의 '가방모찌'였어요. 주석이 파할 때까지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하나둘 가고 나면 새벽 다섯시까지 오선생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날 연습을 복기하고 궁금한 걸 여쭙고... 그때가 배우로서의 DNA를 발견해 가던, 정말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박영규 젊은 시절 과거 사진
이때가 박영규 배우 인생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네요.
막내 역할을 하면서 허송 세월을 보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렇게 박영규처럼 열심히 지식과 지혜를 습득한 사람이 있죠.
박영규: "연극하던 시절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고 하자 동료들이 '라면 불으니 라면이나 먹으라'고 했죠. 하지만 갈구한 꿈을 향해 노력했고 운으로 작용했어요. 친구들이 불가사의한 놈이래요. 하하. 전 촬영이 없는 날에도 온종일 대본을 봅니다. 한번, 두 번, 세 번 볼 때마다 캐릭터에 대한 상상이 달라지죠. 운은 노력하지 않으면 비켜갑니다."
이렇게 박영규는 자신의 성공을 굳게 믿었고, 끊임없이 노력을 했죠.
그렇게 자신을 담금질하던 박영규는 갑자기 중병에 걸립니다.
박영규: "1981년 9월에 '자1122년'이라는 작품에서 묘청 역을 맡았는데, 몸무게가 42kg까지 내려갔어요. 폐결핵이었죠."
결국 대전에 있던 박영규의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겠다며 올라옵니다. 당시 박영규는 연극도 그만두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는데, 집안이 워낙 가난했기에 박영규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 했죠.
박영규: "그때 책 외판원을 했어요. 제가 설득력 있게 말할 줄도 알고, 제가 또 외모와 목소리가 좀 되잖아요. 톱 세일즈맨이었죠. 나중에는 세일즈맨 교육도 맡았고, 1년 반만에 부장까지 승진했어요."
박영규는 세일즈쪽으로 나갔어도 성공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박영규는 확실하게 보장된 길을 버리고, 다시 연극판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때 첫번째 결혼 상대자였던 후배와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됩니다.
후배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박영규의 연기 인생을 살펴보죠.
어쨌든 결핵을 앓던 박영규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다시 건강을 찾게 됩니다.
박영규 어머니: "내가 죽어도 너를 살리겠다."
박영규: "투병 하면서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해서 병이 나았다. 그런 계기들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투지력, 투쟁력, 의지력을 깨닫게 했다."
당시 어머니의 모습이 뒷날 박영규의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투병생활을 하던 박영규는 1983년 연극 한만선으로 복귀하게 되었고, 위에서 언급한대로 1985년, 86년에 연달아 영화와 드라마에 데뷔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88년 '내일 잊으리'에서 박영규는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박영규: "방송에 나가고 나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사정이 확 풀렸습니다. '초록빛 모자'를 20일 촬영했는데, 당시 돈으로 40만원을 받았죠. 세상에 내가 이렇게 큰 돈을 벌다니... 버스 앞자리에 앉아서 상의 안주머니 속으로 몰래 손 넣어서 세고 또 세고... 보증금 100만원 세 살던 시절인데, 보증금 거의 절반을 3주만에 번 거니까요."
당시 처음으로 단기간에 목돈을 거머쥔 박영규의 흥분이 잘 전달되는 것 같네요.
이후 잘 알려진 대로 박영규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통하여 인기 배우가 됩니다.
박영규의 첫번째 부인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서울예대 후배였습니다.
박영규: "아내가 폐결핵 앓을 때 간병해 주었던 서울예대 5년 후배였어요. 같이 연극 '자1122년'에 출연하기도 했죠. 1983년 결혼했는데, 처가 반대가 심했습니다."(박영규 아내 부인)(박영규 배우자 와이프)(박영규 아내 직업)
(박영규가 서갑숙과 결혼했다는 루머가 있는데, 사실 서갑숙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박영규와는 그저 동료 선후배 관계였죠(초록빛 모자의 상대역이었고, 당시 반응이 굉장히 좋았음) . 후에 서갑숙은 노영국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게 됩니다.)
서갑숙 사진
박영규: "장인 장모가 이북분들이었고 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제가 그 입장이라도 허락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양가에서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제 자취방에서 비닐옷장 놓고 신접살림을 시작했지요. 결혼 후 아이를 안고 갔는데도 인정을 안해 주시더군요."
박영규가 가난한 연극배우의 설움을 제대로 당했던 것 같네요.
이때 낳은 아이가 바로 박영규의 유일한 아들인 박달입니다(박영규 자녀 자식)(박영규 딸은 없음).
그런데 약 13년간의 결혼 생활을 하던 박영규 부부는 서서히 멀어집니다.
박영규: "아이와 아이 엄마가 조기 유학을 원했어요. 그래서 둘이 미국으로 보냈는데, 사실상 별거였죠."
결국 박영규는 90년대 중반 첫번째 이혼을 하게 됩니다(박영규 이혼사유 성격차이, 박영규 이혼이유).
그러다가 박영규는 두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당시 톱 디자이너 최모씨였죠(나이는 박영규보다 3살 연상).
박영규: "1997년 가을에 패션 디자이너를 만났어요. 3년 정도 살다가 2001년에 헤어졌죠."(박영규 두번째 아내(부인) 최모씨는 초혼이었음)
당시에 박영규 전처가 결혼 생활을 하다가 암에 걸립니다.
이때 박영규가 전처의 병간호를 헌신적으로 했는데, 일부 언론에는 박영규가 전부인을 완치시킨 다음에 이혼을 했다고 와전되기도 합니다.
박영규: "아내가 이랬어요. "건강할 때도 아내 노릇을 제대로 못했는데, 자신이 없다. 마음 편하게 투병하련다. 당신 편하게 해주고 싶다."이렇게 말하더군요."(박영규 두번째 이혼사유)
박영규의 전처는 실로 담대한 사람이네요. 암으로 허약해진 심신에서 이런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죠.
박영규가 그렇게 전처와 헤어졌는데 이것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세번째 결혼할 때 일부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박영규가 세번째 부인때문에 두번째 이혼을 했다는 루머).
그러다가 박영규는 2004년에 큰 변을 당합니다. 바로 하나뿐인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망 사고였죠.
당시 박영규 아들 박달(이름)은 22살이었고, 미국에서 어머니(박영규 전부인)과 함께 유학 생활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그만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죠.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박영규는 잠정적인 은퇴를 하고 필리핀으로 떠납니다.
박영규 아들 박달 사진
박영규: "아들을 잃고 충격을 너무 받아서 모든 것을 피했다. 그 이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세상을 등지면서 살았다.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지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했다. 자살까지도 생각했다."
박영규: "예전에 이광기씨가 아들을 잃은 사건을 화면을 통해서 보면서 혼자 많이 울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슬픔이 참 다르다."
이번에 박영규와 이광기가 정도전을 통해서 같이 만났는데, 아마 서로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광기 예전 글 새창보기)
2014/04/27 - 이광기아들 사망과 이광기 아내(부인)박지영과 행복
박영규: "아들이 하늘에서 보고 있으니 내 인생의 궤적에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았다. 이광기에게도 '네 죄를 짊어지고 간 아들에게 죄를 사하려면 정말 가치있게 살다 가야 한다. 하늘에 있는 아들에게 쪽팔리지 않도록 더 열심히 연기하라'고 조언했다. 그 심정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사실 자식이 사고로 먼저 떠난 것에 대하여 부모의 책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이기에 죄인처럼 살아가는 것이죠.
어쨌든 자식을 잃은 상실감에 박영규는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는등, 연예계를 완전히 떠납니다. 이 무렵 현재의 부인 김수륜을 만나게 되죠(아들 사고 전에 친분이 있었음).
박영규: "2004년 친구의 결혼식에서 아내를 우연히 만났다. 아들 사고 때도 아내가 같이 있어줬다. 옆에서 많은 힘이 되어줬다."
박영규: "배우로서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흔들리지 않고 같이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인(人)이 아니냐.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내는 내게 힘이 되는 고마운 사람이다."(박영규 삼혼)(박영규 김수륜 2005년 재혼)
그런데 이 김수륜이 좀 유명한 사람입니다. 바로 정호영의 전처였기 때문이죠(정호영은 무기상으로도 활동했던 한국레이컴 회장인데, 정확한 재산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의 재력가입니다. 또한 한때 심은하와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이영애와 결혼한 사람입니다)(이영애 남편)(정호영 회장 전부인).
어쨌든 이런 정호영 덕분에 김수륜 역시 같이 유명세를 치루게 됩니다.
(사실 정호영과 김수륜이 이혼할 때 재산과 위자료 때문에 잡음이 있었는데,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겠죠.)
그래서 김수륜은 되도록 노출을 피합니다.
박영규: "처음엔 아내의 첫남편(전남편)이 누군였는지도 잘 몰랐어요. 지금도 신경쓰지 않아요. 그런 일에 신경쓰기보다 내 사람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 삶을 내가 지켜줘야죠. 정말 좋은 사람인데, 안타깝네요."
박영규의 인생에는 '슬픈 일'과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아들을 잃은 사건이었죠.
박영규: "예전에 신종플루로 아들을 잃은 이광기씨를 TV 화면에서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그 친구의 심경이 어떨지 이해가 됩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슬픔을 몰라요. 나도 너무 충격을 받아 모든 걸 체념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나중엔 나쁜 마음까지 먹었지만 내가 폐인이 되는 건 먼저 간 자식한테 속죄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부모의 허물을 가지고 간 자식을 위해 나머지 인생을 더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박영규는 이렇게 자신을 잘 추스리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사업을 할때도 '어려운 일'을 겪습니다.
원래 박영규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골프장 사업을 하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잡음이 생기면서 결국은 과감하게 포기합니다.
필리핀 현지 소식통: "박영규 부부(박영규와 세번째 부인)가 공동으로 일정 지분을 투자했다. 그런데 투자자 간에 투자금과 지분 문제로 의견 조율이 되지 않았고, 그 일로 박영규 부부는 몇 달 동안 마음 고생을 했다."
결국 박영규는 금전적인 손해를 보고 골프 사업에서 손을 떼는데, 돈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죠. 아들을 잃은 후에 겨우 마음을 다잡고 하려던 사업이었기에 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네요.
게다가 최근에는 오로라 공주에서도 '강제 하차'를 당합니다.
사실 오로라 공주는 문제가 많은 작품이었죠. 손창민, 오대규 등이 하차를 당했고, 결국 박영규 역시 하차를 당하게 됩니다.
박영규: "1년 전부터 제의를 받아 수차례 고사한 끝에 결정한 작품이었어요. 그럼에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처사에 처음엔 섭섭하고 황당했죠. 시청자에게 감동 주는 드라마를 만든다는 사람들의 자세에 실망도 했고요. 지금껏 그런 마음으로 연기한 배우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죠. 제작진이 출연진과 찍은 계약서도 의미가 없더군요."
하지만 박영규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습니다.
박영규: "처음에는 황당하고 섭섭했지만, 인생의 약이 되었죠."
결국 박영규는 정도전이라는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됩니다. 오로라공주를 계속했으면, 정도전에는 출연할 수가 없었죠.
결국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잘 추스린 박영규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사실 박영규에게 꼭 정도전같은 더 좋은 작품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그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삶의 여러 굴곡들을 잘 넘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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